강화포커스
강화의 예술가 : 강화지역 예술가 정보입니다
 
작성일 : 09-04-16 14:20
작곡가 최영섭

 

'그리운 금강산' 작곡가 최영섭 선생님을 찾아서

- 누구의 주제련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이천봉 말은 없어도 - 

- 이제야 자유만민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 -

  최영섭 작곡 한상억 작시 우리나라 국민의 애창 가곡 ‘그리운 금강산’ 中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서 출생한 최영섭(80) 선생님. 팔순이라고 해서 허리 구부정하고 얼굴에 검버섯이 피어있는 보통 팔순 노인을 생각하고 약속 장소인 광화문으로 나갔다. 기자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멋지고 정정하셨다. 고향 사람을 만나 너무 반갑고 좋다며, 환한 미소를 띠면서 인근의 오랜 단골찻집으로 향했다.


작곡가는 죽는 전날까지 작곡해야… 올해로 60년째

“1949년 경복중학교 5학년 시절 제1회 작곡발표회를 했어요. 그로부터 올해가 꼭 60년째입니다.”


후배들을 위해 방송활동은 10년 전에 접고, 지금은 음악계 고문, 명예직 등으로 바쁘게 사신다는 선생님은 팔순의 나이에도 작곡에 여념이 없으시다.

대표곡인 ‘그리운 금강산’ 작곡에 관해 여쭤보았다. 선생님은 그 당시를 회상하며 감상에 젖는 듯 잠시 눈을 감고 침묵 하시더니, 떠는 듯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우리나라의 산, 바다, 강에 대해 20여곡을 작곡 했는데, 동요작곡가 한용희씨가 왜 금강산에 관한 노래는 없냐고 묻더군요.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화 출신으로 30여곡을 함께 작업했던 절친한 파트너 사이였던 한상억씨에게 바로연락을 했죠. 그렇잖아도 금강산에 대해서 시를 하나 지은 게 있는데 3절을 완성 못했다는 겁니다.  3절까지는 필요 없고 12절만 있으면 되니까 그 시를 달라고 했어요. 미완성인 그 시를 받아본 순간 너무 가슴에 와 닿아 20번을 읊었어요. 20번을 읊고 나니 악상이 바로 머릿속에 떠올라서 그 자리에서 작곡하고 음표하나 안고치고 하루 만에 완성한 게 바로 ‘그리운 금강산’입니다. 이렇게 명곡이 된 것은 제 곡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분단으로 고향에 못가는 애달픔을 구구절절 표현한 가사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같아요.”

하루만에 곡이 나오고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방송되고,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행사에 칸타타 “오! 사랑하는 나의조국”(전24장)을 공연할 때였다. 그리운 금강산이 끝나자 다음 곡을 부르지 못할 정도로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때의 기분은 하늘로 붕 뜨는 듯한 짜릿한 전율 그 자체였다. 아직도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난 듯 선생님은 눈을 지긋이 감고 담배 한 개피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음악가의 소질을 선천적으로 타고 나신 선생님

한 분야에서 천재 소리를 들으려면 선천적으로 타고 태어나던가, 후천적으로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된다고 보는데, 선생님은 이 두 가지가 합쳐진 것 같다

어린 시절을 강화에서 보낸 선생님은 구슬치기, 자치기, 딱지치기, 제기차기를 하면 당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개구쟁이였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소질이 다른 아이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선생님이 7살 때 온수리의 김 의원 원장님은 측음기를 손으로 돌려 ‘할렐루야’를 즐겨 듣곤 했었다. 선생님은 놀다가도 이 음악이 들리면 뛰어와 문 앞에 얌전히 앉아 음악 감상을 했다. 어린 시절, 한 번 가르쳐준 노래는 가사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불렀다. 이런 선생님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와 외삼촌께서,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고 이사를 시켰다. 인천 창녕초등학교로 전학 간 선생님은 놀이에 정신이 팔려 5학년 때는 겨우 낙제를 면하다가 외삼촌께 크게 꾸지람을 듣고, 6학년 때부터 마음먹고 공부해 전교 1등을 했다. 인천중학교 3학년 때 해방을 맞으며 서울로 올라가, 그 당시 명문학교였던 경복중고교에 혼자 찾아가서 입학을 시켜 달라고 할 정도로 당차고 똘똘한 아이였다. 피아노에 수북하게 쌓인 먼지를 참기름 먹인 기름걸레로 깨끗이 닦는 모습이 선생님의 눈에 띄어 그 당시 보기도 힘든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루에 한 번씩 피아노를 연주하며 피아니스트가 되려는 생각도 했는데, 손이 작아 포기하고 작곡을 하기로 결심했다. 고등학교 때는 밴드 부장을 하면서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루었는데 훗날 음악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선생님은 음악을 시작하게 된 어린시절의 이 모든 경과들을 음악가로서의 ‘숙명’이라고 표현했다.


잊을 수 없는 내 고향 강화

  식당에 가서 돼지고기를 먹을 때면, 상에 차려진 새우젓이 강화 외포리 새우젓이냐고 물어볼 정도로, 강화인이란 것을 일부러 티를 내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신다는 선생님.  사기리 앞바다, 10리길 되는 길상 소학교 등 어린 시절을
보낸 강화를 생각하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다고 하셨다.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구내광장에 세워졌고, 이미 선생님의 생가비도 화도면에 세워졌다. 모친 신순례여사는 선생님을 키운 공로로 “장한예술가의어머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프로필이 A4용지 두 장을 꽉 채울 정도로 경력이 화려한 선생님. 가곡, 기악곡, 합창곡 오페라를 합해서 작곡하신 노래가 480곡이 된다.

선생님은 현재 교향시곡 ‘고요한 아침의 나라 동녘바다에 해가 솟는다’, 광복 50주년 칸타타 24장, 가곡집 상권 ‘그리운 금강산’ 80곡과 하권 ‘목계장터’ 80곡등의 출판을 준비하고 계신다. 또, 고향 강화를 유일하게 조국의 안녕을 생각하는 섬이라며 호국정신의 섬 강화에서 ‘홍익인간 문화예술제’ 가 꼭 개최되었으면 한다고 말씀하셨다. 시작이 조촐하더라고 나중에는 목포가요제만큼 큰 예술제로 만들어 나갔으면 하는 것이 바램이라고.

기축년 새해를 맞아 강화 군민에게 복 받은 땅 강화에서 살기 때문에 건강 하시고 복도 많이 받고 더불어 돈도 많이 벌 것이라는 새해 인사도 빼놓지 않으셨다. 고향 사람을 만나 인터뷰 하니 어느 자리보다 편안해 사적인 얘기도 많이 했고 정말 반가웠다며 정겹게 웃는 최영섭 선생님의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은 왕성한 활동과 긍정적인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고연순, 이승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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